잔루:서명사는 한나라 전교 종파의 건립을 추진하여 중일 문화교류를 추진했다

11월 18일, 중국불교협회 부회장, 북경대학 남아시아학부 교수, 박사생지도교수 잔루 (담여) 가 중국전파불교선조문화 국제학술세미나에서 연설을 발표했다 湛如:西明寺推动汉传宗派建立 促进中韩日文化交流

중국불교협회 부회장, 북경대학 남아시아학과 교수, 박사생지도교수인 잔루 (잔여)는 한나라 불교선조문화 국제학술세미나에서 연설을 발표했다

11월 18일소식:오늘 오전, 한전 불교조상문화 국제학술연구토론회가 서안에서 개최되였다.중국불교협회 부회장, 북경대학 남아시아학과 교수, 박사생지도교수 잔루 (잔여)는'서명사 대덕과 당나라 장안불교'라는 제목의 연설을 했다.다음은 찬루가 세미나에서 한 발언 발취이다.

조정과 종파가 창건되고 대덕과 종풍거양, 법맥천년, 법원이 륭창되였다.ZuTing 대덕 생전에 유서를 파의 시조 주재시게, 저술을 말을 인용 한 학자, 널리 법은 연회 ZuTing 시조는 또한 종파 탑 소재지 대축 일 공양, 앙이 더욱 높은 년 때와 달리, 지나 간 세월 ZuTing 나날이 HanChuan 종파 불교의 체계적인 기억은 꿈속에서 고향과 같은 종파 법 맥의 정신적 삶의 터전이다.

당대 장안 (長安) 불교는 탑과 사원이 매우 많고, 고승과 선조가 즐비하다.초당사, 자은사, 대흥선사, 향적사, 정업사 등의 도장은 창종립파로 이름이 널리 알려진 유서 깊은 절이다.그리고 본문이 주목하는 서명사는 창종립파의 많은 대덕들이 석주에 상주하였기 때문에 역사책에 이름이 남아 있다. 서쪽에서 동서로 옮겨 다니는 고승들이 경전을 번역하고 책을 저술하여 설을 세우고 홍법을 수양하는 등 수백 년간 그 대가가 적지 않았다.

서명사 (西明寺)는 같은 거리의 대장장사, 같은 거리의 자은사 (子恩寺), 천푸사 (陳福寺)와 함께 당시 황실의 사원으로 불렸다.서명사는 국가의 제사를 지내는 중책을 맡고있는데 승려인 혜효는 일찍 당조종에게 복을 기원했다.그다음, 이곳은 국가의 번역장으로 현장, 의정 등이 많은 경전을 번역했고, 어제 장경 서명사 (西明寺) 소장도 있는데,이 서장은 봉기군에 봉기된 후 돈황의 장경 사본에 영향을 주었다.남산 율종 도선 (道善), 법상종 서명 (西明) 계 원측 (元측), 밀종 선무담 (密宗), 화엄 (華엄종) 법장 (法藏) 등 고승들이 모두 이곳에서 법을 고쳤고, 돈황의 법성 (法成), 담광 (담광) 등은 서명 (西明) 사와 밀접한 학술적 연원이 있다.

한나라 불교 종파 발전사상 주요 도장으로 서쪽에서 온 많은 일본 · 한국 유학승, 동쪽에서 온 서역승, 나아가 서천에서 순례를 하는 대덕이 이곳에 상주하고 있다.서명사의 역할과 력사적업적은 중국 불교사에서 중요한 의의를 가지고있을뿐만아니라 한나라 불교의 국제교류에도 심원한 영향을 끼쳤다.

『 송고승전 』에는 서명사와 관련된 승려가 최소 22명으로 의정 · 현장 · 선무외 · 원조 · 법보 · 양수 · 지혜 · 혜경 · 원측 · 도세 · 도선 · 혜림 · 단보 · 백수 · 숭업 · 현통 · 경운 · 도수 · 도추 · 혜칙 · 혜립 · 혜안 · 무적 등에 포함돼 있다.고승들의 지혜는 기나긴 력사를 빛냈고 그들이 남긴 성과는 후세사람들로 하여금 높이 우러러보게 한다.

많은 스님들 중에서 우선 현장 (玄奘) · 의정 (義定) · 선무겁 (善無무서움) 등을 위수로 한 경전을 번역한 고승들이 당나라 장안에 이역 문화를 가져왔다.그들은 서명사에서 경전을 번역하면서 불교의 발전에 튼튼한 기초를 닦아놓았다.그중 현장 한 사람이 번역한 경전은 76 부 1,347권으로 당나라 전체 번역경전의 절반이나 된다.한편 경역번역에 참여한 호승은 당조에 한족과 다른 생활양식을 가져왔다. 원진은 ≪ 법전 ≫에서"녀들은 호녀 (胡女)를 위해 호장 (胡服)을 배우고 호음 (胡音)에 들어가 호악 (胡樂)을 무음 (武音) 한다.호인은 서천동토에서 왕래하면서 견식이 넓고 많은 이야기가 발생하였는데, ≪ 태평광기 ≫에는 무측천 (武측천) 시기에 호인이 서명사 (西明寺) 승에게서 청니보주 (靑니보주)를 산 이야기가 실려 있어 서명사와 호인 사이에 밀접한 교류가 있었음을 충분히 알 수 있다.

다음은 도선 (道仙), 도세 (道世) 등 고승들로 이들은 서명사 (西明寺)에서 저작을 편찬하여 당나라 문학에 심원한 영향을 끼쳤다.서명 사원은 많은 책을 소장하고 있으며, 서명 사원의 존재는 주석에 있는 승려들에게 여러 중가를 널리 모실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였으며, 그 중 도선 (道선사) 35 부 188권, 도세 (道世) 12 부 156권의 저작이 있다.이러한 서적들의 출현이 많은 중요한 불교 사료들을 보존했을 뿐만 아니라, 책 속의 인과응보, 감응 영험류의 기록도 당나라 전기의 기이한 문학 창작에 원천을 제공하였다.도선 (道善)의 「 대당내전록 (大唐內典錄) 」에 기재된 가순 (家順) 거사 (居士) 가 경을 초조한 일은 이야기가 널리 전해지고 있다.유전하는 과정에서이 이야기는 끊임없이 개편되어, 원래 글이 간결하고 언어가 평이한 이야기가 거듭 가공되어 풍만하고 생동한 체계를 이루었다.이러한 편찬 체계의 형성은 일본의 대안 (大安) 사 문화 형성에도 중요한 역할을 하였는데, 장중의 시농부 (詩눙푸)는 『 감진전 (감진전) 』이 서명 (西明) 사의 영향을 받아 편찬되었다고 주장한다.

상술한 경전을 번역하고 편찬한 고승들 외에도 많은 승려들이 절에서 교리를 깊이 연구하여 종파의 학설을 계승해 나가고 있다.해동법장원측 (海东法章元信)이 바로 그중 대표적인 인물이다. 그는 현장으로부터 유식을 배워 법상종 서명계를 개척했다.그 외 구사파의 법보, 율종의 도선, 화엄종의 법장 등 헤아릴 수 없이 많다.이 외에도 많은 승려들이 매우 박식하다.이런 승려들은 서명사 홍화쪽에서 불교의 신불을 전승하는데 마멸할수 없는 기여를 했으며 서명사에서 나온 홍법고승은 세계에 널리 알려져있다.제257권 「 당하남룡문청파사비 」, 제587권 「 용안해선사비 」, 제731권 「 양주화림사대비선사비명 」, 제930권 「 백학사기 」에는 모두 비주가 서명사에서 공부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서명사의 승들은 불교의 발전을 추진하는외에 장안의 사대부와 외국의 류학승들에게도 적극적인 기여를 하였다.하나는 문인 사대부들의 빈번한 서명사 방문이다.당조때 많은 문인들이 기거했던 사찰인 서명사는 문화분위기가 깊기 때문에 많은 문인들이 선호하는 곳이다. 유명한 시인 백거이와 맹교도 여기에 시를 남겼으며 문인들이 황제를 만난 이야기도 전해지고 있다.이밖에 세가인들은 서명사와 매우 밀접한 련계를 가지고있는바 ≪ 당조묘지회편속집 ≫과 057조에는 태원 왕씨일가가 서명사의 승이라고 기재되여있다.

다른 한편, 서명사가 형성한 문화 분위기는 대량의 외국 승려들을 주석에 주재하게 하여 서역과 해동 등지에서 불교가 교류하는 학술 캠프와 문화 진지로 되게 하였으며 장안에 새로운 문화를 가져다 준 동시에 장안문화를 세계에 전파하였다.서역 방향, 위에서 언급한 도선이 편찬한 「 대당내전록 」에 기재된 이야기는 심지어 멀리 회홀에 이르기까지 그 일례로 된다.이밖에 류공권의 ≪ 금강경 ≫ 비문은 원래 서명사 (西明寺)에 있었는데 송나라때 훼손되여 세상에 전해지지 않다가 근대에 백희화가 돈황의 장경동에서 탁본을 찾아내여 서명사와 돈황간의 밀접한 관계를 엿볼 수 있다.해동으로 신라의 원측, 일본의 도자, 공해, 엔진, 나가타케, 엔재도 시이 절에 상주했다.그들은 이곳에서 불법을 배우는 동시에 중국의 문화도 본국에 가져왔다. 도자는 서명사를 본보기로하고 일본 대안사 (大安寺)의 설계와 건축에 참여하였다.공해는 일본에 돌아온후 진언종 (眞言宗)을 세우고 세상에 이름난 동밀 (東密)을 발전시켰다.엔친은 일본에 돌아온후 천태종 제5대 좌주로 되였고 승교를 지냈다.불교 방면뿐만 아니라, 서명사는 일본의 민속 문화에도 깊은 영향을 끼쳤는데, 앞에서 언급한 남가일몽은 「 우월물어 (雨月物語) 」 중의 꿈잉어가 되었고, 호승 (胡僧)이 보물을 알게 되었던 이야기는 「 금석물어 (金石物語) 」와 「 우치습득물어 (羽治습득물어) 」 중의 당인이 보물을 알게 되었다.

서명사는 경전의 번역과 저서의 입설 과정에서 당나라 불교의 발전에 중요한 영향을 끼쳤으며, 서명사 출신의 대덕은 한나라 전도 불교 종파의 건립을 추진하여, 당시 중 · 일 불교문화의 중요한 연결고리 중의 하나가 되었다.